日本속의 韓民族史 탐방
沙月 李 盛 永(2009.5.26)
-나라(奈良)에서 아스까(飛鳥)까지-
  ▶ 일본 정치사적 시대구분
    - 규슈 일대에서의 한민족사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주로 왜(倭)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역사지만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등지의 한민족사는 우리나라 역대 왕조와 일본(日本)정권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사적 시대의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시(原始)시대>
    - 일본열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0만년 전부터라고 추정되고 있다.(그 때는 일본땅은 대륙에 붙어있었다)
    - 약 1만년 전 빙하시대가 끝나면서 지각변동이 일어나 일본 땅이 대륙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 사이에 바다 물이 채워져 동해(東海)가 생기면서 일본열도가 되었다.
    - 일본열도에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조몬(繩文,승문: 새끼줄무늬) 토기가 사용되면서 조몬(繩文)시대라 한다.
    - 기원전 3세기에 벼농사, 도기제작술, 관개(灌漑)기술 등이 한반도로부터 전래되어 농경생활이 시작되는데 이 시기를 야요이(彌生,미생)시대라 한다.

  <야마토(大和)시대>
    - 4세기경 농경문화의 발달로 생겨난 약 100여개의 작은 부족국가들이 긴키지방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천황을 모시는 야마토(大和)정권이 성립된다.
    - 권력을 잡은 왕과 귀족들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거대한 분묘(墳墓)를 경쟁적으로 축조하기 때문에 이 때를 고분(古墳)시대라고도 한다.

  <아스카(飛鳥)시대>
    - 6세기경 한반도 백제(百濟)으로부터 불교(佛敎)가 전래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소가(蘇我)씨와 일본 토착 신도(神道)를 신봉하던 모노노베(物의部)씨 간의 세력다툼이 시작된다.
    - 이 세력다툼에서 승리한 소가(蘇我)씨는 천황을 능가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는데 이 때 권력을 잡은 쇼토쿠(聖德,성덕)태자는 불교 뿐만 아니라 유교까지 적극 수용하여 호류지(法隆寺,법륭사) 등 많은 사찰을 세웠다.(성덕태자가 주관하여 세운 절이 법륭사, 광륭사, 사천왕사 등 7대가람이 있다고 한다)
    - 이 시기에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선진문화 특히 불교문화가 아스카(飛鳥) 를 중심으로 눈부시게 발전한다.

  <나라(奈良)시대>
    - 국가체제가 정비되자 정치의 중심이 되는 수도(首都)가 필요하게 되자 서기710년 중국 수도 장안(長安: 현 西安) 을 모델로 하여 나라(奈良) 헤이조코(平城京,평성경) 이라는 수도를 건설한다.
    - 서기 794년 교토(京都)로 천도할 때까지 약 70년간 천황 중심의 율령(律令)정치를 하며, 수도는 번창하고 귀족문화 특히 불교가 번성하였다.
    - 문화적으로 백제(百濟) 와의 교류가 왕성하였고, 백제 멸망 후에는 많은 백제 유민이 유입하여 오히려 백제문화(불교)가 더욱 발달하게 된다.
    - 중국과도 교류가 활발하여 전후 6회의 견당사(遣唐使) 를 파견하여 대륙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시기이다.
    - 반면 거국적인 조사조불(造寺造佛) 의 대사업이 추진됨으로써 국민생활이 궁핍해지고, 국가재정이 파탄나는 계기가 된다.
    - 이 시대에는 고지키(古事記, 712년), 니혼쇼키(日本書紀, 720년) 등 역사서가 편찬되고 ‘니혼(日本)’ 이라는 국호가 정식으로 사용된다.

  <헤이안(平安)시대>
    - 서기 794년 간무천황(桓武天皇) 교토(京都) 로 천도하면서부터 서기 1185년까지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원뢰조)가 가마쿠라(鎌倉,겸창)에 막부(幕府)를 설치할 때까지를 헤이안(平安)시대라 한다.(아마 나라가 가장 평안했던 시기라는 뜻인 것같다)
    - 이 시기에는 일본 고유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하는데, 가나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서기 1000년 경에 한 궁녀가 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가 일본 산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다.
    - 그러나 수도와 궁중이 예술과 향락에 여념이 없는 동안 천황의 권위는 추락하고, 지방에서는 장원(莊園)을 바탕으로 호전적인 사무라이(武士) 가 힘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가마쿠라(鎌倉)시대>
    - 서기 1185년까지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원뢰조)가 가마쿠라(鎌倉,겸창)에 막부(幕府)를 설치하여 사무라이(武士)정권을 수립하면서 일본은 고대 전제군주제에서 중세 봉건제도로 넘어간다.
    - 이 때부터 메이지(明治)유신(維新) 이 단행될 때까지 약 700여 년 간 일본은 사무라이(武士) 들에 의한 군사정치가 지속된다.
    - 그러나 가마쿠라(鎌倉,겸창)에는 종래의 귀족세력도 쇠퇴하지 않은 상태라 교토조정(京都朝廷: 천황)과 가마쿠라(鎌倉,겸창) 막부 양대 세력이 병존하는 2원적 지배체제가 약 150년간 지속된다.
    - 13세기 후반 몽고의 일본원정이 태풍으로 실패하자 ‘일본은 신(神)이 수호해 주는 나라’라는 신국사상(神國思想) 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막부세력은 급속히 쇠퇴하자 서기 1333년 고다이고천황이 막부를 무너뜨리고천황 중심의 정치를 부활시켰다.
    -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다카우지(足利尊氏,족리존씨)는 고다이고천황을 추방하고 다시 막부를 세운다.

  <무로마치(室町)시대>
    - 다카우지(足利尊氏,족리존씨)가 교토(京都) 무로마치(室町) 에 막부를 다시 세우면서 이후 250년간 무로마치(室町)시대가 지속된다.
    - 그러나 고다이고천황요시노에 세운 조정(南朝)다카우지가 옹립한 천황(北朝)이 대립하면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남북조(南北朝)시대가 된다.
    - 8대 막부 통치자 요시마사가 방탕한 생활로 힘을 잃게 되자 교토를 중심으로 한 무사들의 파벌싸움이 11년간 지속되면서 막부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고 대규모 파괴와 무질서가 자행되는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 가 100년 동안 이어진다.

  <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
    - 16세기에 이르러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가 전국이 평정되나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두고 암살 당하자 그 신복의 한 사람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 정권을 잡아 1590년 일본 천하를 통일한다.
    - 그는 여세를 몰아 중국 정벌이란 핑계 하에 1592년 조선을 침략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1597년 병사하고, 1598년에 왜군은 총 철퇴를 한다.
    - 이 시대는 무역으로 부(富)를 일군 상인과 사무라이(武士)들이 중심이 된 웅대하고 호화로운 문화가 발달하였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웅장한 성(城) 을 축조한다.

  <에도(江戶)시대>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날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에게 그 아들을 부탁하지만 도쿠가와는 야망이 있는 사람으로 도요토미정권에 도전하고, 그 아들을 이를 지키려는 패와 내전 상태에 들어가는데 서기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도쿠가와가 승리하여 패권을 잡고 에도(江戶)에 막부를 설치한다..(풍신수길의 아들은 오사카성에서 자결)
    - 에도 막부는 일족과 가신들에게 영지를 배분하고, 참근교대(參勤交代: 일종의 인질)제도를 만들어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 들을 통제한다.
    - 사(士)-농(農)-공(工)-상(商) 의 신분 질서를 더욱 엄중히 하고, 기독교를 금하고, 쇄국령을 내려 이 시기에일본 독자적인 문화와 산업이 발달하고, 연극, 문학, 음악, 미술 등 대중문화가 발전한다.
    - 1853년 미국의 개항 요구에 따라 막부정권은 재정난으로 쇠락하자 1867년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한다. 이를 대정봉환(大政奉還) 또는 왕정복고(王政復古) 라 한다.

  <메이지(明治)시대>
    - 300여년 내려오던 도구가와 막부로부터 정권은 반환 받은 메이지(明治)천황유신(維新) 을 단행한다.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치 아래 학제(學制), 징병령(徵兵令), 지조(地租: 토지와 관련된 세금)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 함으로서 아시아에서는 맨 먼저 근대국가로 진입한다.
    - 이러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은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관주도(官主導)로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로 밀어 부쳐 군국주의 정체 부활하여 조선제국을 합방하고, 만주에 괴뢰정권을 세워 철도부설, 광석채굴 등 이권을 차지하고, 중일 전쟁을 일으켜 방대한 중원을 석권하고, 동남아로 진출하더니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유발하여 종국에 가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 두 개의 세례를 받고 무조건 항복하여 패전국이 되었다.
  ▶ 나라(奈良, 인구 37만명)
    -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서 고분과 유적, 궁적(宮跡)이 많으며 서기 710년(통일신라 성덕왕9년) 아스카(飛鳥)로부터 천도하여 794년(신라 원성왕10년)에 교토(京都)로 천도하기까지 84년간 일본의 수도로 일본 최초의 국가형태인 야마토(大和)정권이 세워지면서 ‘국가(國家)’라는 뜻의 우리말 ‘나라’가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

    - 나라에는 일찍이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시대의 불교문화가 들어와 다른 어느 곳 보다 불교 사찰과 유적이 많다.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사찰 도다이지(東大寺)를 비롯하여 고후쿠지(興福寺), 약초사(若草寺) 등 불교사찰과 일본에서 역사가 깊은 기스기타이샤(春日大社) 신사(神社) 그리고 주로 불교미술을 전시한 국립나라박물관(본관은 일본식, 별관은 서양식) 등이 있는데 이들을 묶은 5.25 평방Km가 나라공원(奈良公園)으로 조성되어 있다.

    - 나라시 중심부에서 약간 서쪽에는 일본 최고(最古)의 목조 오중탑(五重塔), 고구려 담징(曇徵)이 그렸다는 금당벽화(金堂壁畵)가 있는 세계에서 최고(最古) 목조건물 금당(金堂: 法堂), 일본 국보 중의 국보로 평가되는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 등이 있는 호류지(法隆寺)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 도다이지(東大寺)
    - 도다이지(東大寺는 대불(大佛)을 모신 대불전(大佛殿)을 비롯하여 일본 국보급 건축물과 불상을 많이 보유한 일본 불교문화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 성무천황(聖武天皇)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고, 여러 고장에 세워진 국분사(國分寺)들을 총괄하는 본산 총국분사(總國分寺)를 겸하게 할 의도로 745년(통일신라 경덕왕4년)에 개창 불사를 시작하여 서기748년에 삼월당(三月堂, 현 法華堂)을 준성하고, 서대사(西大寺)에 상대하여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라 명명하였다.

    - 서기 747년에 대불(大佛)을 주조를 착수하였는데, 백제사람 군나카노기미마로(國中公 痲呂)가 불모장(佛母匠)이다. 이에 앞서 서기 708년(신라 성덕왕7년) 신라사람 김상원(金上元)이 찾아낸 구리광맥에서 채굴한 구리가 주조에 사용되었고, 서기 749년 백제사람 경복(敬服)이 무츠노가미(陸奧守)에서 채광한 황금 900냥으로 15m 높이의 노사나좌불(盧舍那坐佛)이 신라와 백제인의 합작으로 완성되었다.

    - 대불(大佛)을 모신 대불전(大佛殿)신라사람 건축가 이나베노모모요(猪名部百也)에 의해 높이 50m나 되는 웅장한 건물이다. 서기752년에 대불의 개안법요식(開眼法要式)을 거행하여 일본 제일의 불상과 법당이 완성되었다.

    - 대불의 광배(光背)는 19년 후인 서기 771년에 설치하였고, 서기 855년에 머리가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는데 서기 861에 수리가 끝났다. 서기 1180년(고려 명종10년)에 동대사에 큰 불이 나서 대불전이 다 타고, 대불도 완전히 녹아 없어졌다.

    - 대불은 118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재현되었으나 백제 조각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투박한 모습으로 대불이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많았다고 한다. 대불전은 1195년에 중건이 완료되었으나 1709년(조선 숙종35년) 다시 지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1980년에 큰 수리가 있었다.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 동대사 건축물이 재건되면서 전형적인 일본적인 형식으로 건조되어 옛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 원래 신라인에 의해 창건된 대불전과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진 대불의 모습은 대불전내 왼쪽 뒤에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는데 원래 동대사는 목조의 동서탑(東西塔)이 있는 쌍탑(雙塔)가람이었다.
동대사 표석
동대사 남대문 大華嚴寺(대화엄사) 현판
사천왕상
정영호교수의 설명
중문
대불전(大佛殿)
청동등
-대불전(大佛殿)에 모신 부처들-
대불전 대불(大佛) 노사나좌불(盧舍那坐佛)
관음보살
허공장보살
사천왕 광목천(廣目天)과 다문천(多聞天)
원래의 동대사 모형
?
도깨비문양와당
위는 동대사 출토품이고, 맨 아래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귀면와이다.
귀면 또는 도깨비는 치우(蚩尤)의 상징물이다.
대불전 기둥 밑둥의 구멍으로 빠져나오기
이 구멍은 본존 대불의 콧구멍 크기와 같다고 한다.
이로써 대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연못 위로 보는 동대사 원경
동대사 기둥 크기
기둥은 가운데가 불룩하게 나온 ‘배흘림’으로 신라사찰에서 보는 기법으로
동대사 금당을 신라인이 지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한다.
사람과 사슴이 한데 썪여
주차장에 돌아와
  ▶ 호류지(法隆寺)
    - 서기607년(백제 무왕7년, 丁卯)에 인근의 법기사(法起寺), 법륜사(法輪寺)와 함께 백제에서 건너가 건축을 주도한 공술인(工術人)들에 의해 호류지(法隆寺)의 창건 역사(役事)가 진행되었다고 법륭사에 보존되고 있는 약사여래상 정묘년(丁卯年: 서기607년) 명문(銘文)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 본존불인 석가삼존불상(석가여래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의 서기623년(백제 무왕 24년)에 안작지리(鞍作止利)가 불모장이 되어 조성(造成)하였다고 광배(光背)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기록되어 있는데 지리(止利)백제사람 다수라(多須那)의 아들이고, 안작촌주(鞍作村主) 사마달의 손자이다. 지리불사(止利佛師)는 모셔간 불상을 모본(模本: 모델)로 삼아 현지에서 조성하였다.

    - 현대 학자들은 이들 계열의 불상을 ‘비조불(飛鳥佛)’이라고 통칭하는데 법륭사에는 금당의 본존 석가여래삼존불(釋迦如來三尊佛: 일본 국보)을 비롯하여 구관세음상(救觀世音像: 일본 국보), 백제관음(百濟觀音: 일본 국보), 석가이존불(釋迦二尊佛), 금동구관세음상(金銅救觀世音像: 일본 국보), 협시육체보살상(脇侍六體菩薩像) 등 일본 국보급 십수구(十數軀)가 보존되고 있다.

    - 서기670년(통일신라 문무왕10년) 법륭사가 소실되어 서기 708년에 재건한 것이 지금의 법륭사이다. 그런데 1939년에 지금의 법륭사 서남편에서 최초 법륭사 터가 발굴되었는데 소위 백제칠당가람제도(百濟七堂伽藍制度) 즉 남문-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에 배열되고, 둘레에 회랑을 지어 감싼 형태를 하고 있다.

    - 법륭사 금당에는 고구려 스님 담징(曇徵)이 그렸다는 벽화가 뛰어난 작품으로 전해지는데 1949년 불에 타서 손상을 입어 보관 중이라 한다.

    - 지금의 법륭사 건축물들도 고구려적이라는 심증이 가는데 고구려의 독특하고 독창적인 문화의식이 다른나라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기둥머리에 얹는 주두(柱頭)를 개성있게 조성한 것 등이다.
법륭사로 가는 버스에서 자작
연도에 보이는 공동묘지
법륭사 표석
남대문을 향하여 입장
남대문과 금강역사(金剛力士)
금당(金堂)과 오중목탑(五重木塔)
오중목탑(五重木塔)
오중탑 동면의 탑본소상(塔本塑像)
문수(文殊)와 유마(維摩)의 문답
청동등
금당(金堂)
금당, 오중탑, 몽전 등에 보존된 불상들
-‘사진촬영금지’라 구경만 하고, 여기에는 구내에서 판매하는 소개책자와 엽서에서 스캔한 것-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 일본 국보)
관음보살상(觀音普薩像: 일본 국보)
구관세음상(救觀世音像: 일본 국보)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 일본 국보)
일본 국보로 대보장전(大寶藏殿) 특별실에 소장된 높이 2,8m의 목조입상(木造立像)이다.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이를 보고
“만약 일본열도가 침몰해서 단 한 가지만 갖고 빠져나가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백제관음상’을 택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고구려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벽화
아미타삼존불
다문천왕
몽전(夢殿: 聖德太子를 모신 곳) 안내판
입구 건물과 몽전이 겹친 풍경
몽전(夢殿)
성덕태자 섭정상(攝政像)과 좌상(坐像)
금동구관세음상(金銅救觀世音像: 聖德太子胎內佛)
법륭사를 떠나며
  ▶ 아스카(飛鳥)
    - 6-7세기에 한반도로부터 불교 등 여러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문화를 꽃피웠던 고장으로 일본문화의 고향이며, 일본 고문화지구(古文化地區)로 지정되어있다.

    - 아스카(飛鳥)평원에는 일본 고대 궁적(宮跡), 절터, 고분 등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유적이 석무대(石舞臺), 고송총(古松塚), 비조사(飛鳥寺)터 이다.

    * 나의 골프클럽 아이언이 ASCA501이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제조회사 이름인줄 알았는데 이제 알고보니 일본에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아스카(飛鳥) 문화'의 발상지가 아닌가! 이 또한 무슨 인연같은 느낌이 든다.
나의 아이언 골프클럽
  ▶ 다카마쓰(高松塚)
    - 일본열도에는 고구려의 흔적이 많은데 고송총(高松塚)은 가장 확실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고구려계 유적이다. 죽순을 캐던 농부가 발견하여 1972년 정식 발굴하면서 당시 일본 전후의 최대 발굴로 평가되었다.

    - 고송총(高松塚)은 직경 18m, 높이 5m의 원분(圓墳)으로 그리 크지 않고, 피장자(被葬者)의 신분도 그리 중요한 인물로 보이지 않지만 일본학자들은 물론이고 한국과 북한 학자들까지 모여 발굴 결과에 관심을 가지고 격론을 벌렸던 유적이다.

    - 고송총(高松塚)은 이미 도굴되었기 때문에 부장된 유물은 많지 않지만 길이 265Cm, 폭 103Cm, 높이 113Cm의 석실 벽과 천장에 그려진 벽화가 피장자의 국적, 당시 남녀 복장, 사신사상(四神思想: 좌청룡, 우백호, 북현부, 남주작) 등을 엿볼 수 있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 일본에서는 벽화가 있는 고분을 장식고분(裝飾古墳)이라 하는데 규슈 북부에 몇 개이었지만 벽화 내용이 주술적(呪術的) 성격의 간단한 그림이라 역사나 당시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생각을 추정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고송총(高松塚)벽화는 사면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채색벽화로 천정에 흰 점으로 표시한 북두칠성 등 성숙도(星宿圖: 星數圖)가 있고, 남자군상(男子群像)2, 여자군상(女子群像)2, 일상(日像: 안에 三足烏 그림)1, 월상(月像: 안에 두꺼비 그림)1, 사신도(四神圖) 중 현무(玄武), 청룡(靑龍), 백호(白虎)가 각각 한 개씩 도합 10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 특히 일상 안의 삼족오(三足烏)와 월상 안의 두꺼비 그림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삼족오를 해의 상징물로, 두꺼비를 달의 상징물로 여겨왔으며 특히 고구려 고총에서 일상과 삼족오, 월상고 두꺼비 그림이 많이 나온 점, 남녀군상의 복장과 머리모양 등으로 보아 이 무덤의 피장자나 무덤을 만든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고, 고구려인임을 확실히 말해주고 있다.

    - 고송총(高松塚)’이란 이름은 고총에 큰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며, 현장에는 진짜 고분은 보수 중으로 가림막으로 가려 놓았고, 인근에 모조로 고분 내부를 재현한 전시관을 만들어 관람을 시키고 있다.
현장 보수중 접근금지
작은 관람구멍으로 멀리서 보수작업 중인 것을 찍은 것이다.
발굴당시 장면(팜푸렛)
천정의 성수도(星數圖) (팜푸렛)
각 벽면 벽화 배치도(팜푸렛)
남자군상 2폭(팜푸렛)
여자군상 2폭(팜푸렛)
현무상(玄武像) (팜푸렛)
월상(月像), 일상(日像), 백호상(白虎像), 청룡상(靑龍像) (팜푸렛)
부장품 유물(팜푸렛)
해수포도경(海獸葡萄鏡), 대도외장품(大刀外裝品), 유금구(留金具), 금동제투식금구(金銅製透飾金具)
현장 길목에 벽화를 조경으로 모형화
  ▶ 이시부타이(石舞臺)
    - 이시부타이(石舞臺)고분은 아스카천(飛鳥川) 상류 구능 자락 중간에 큰 것은 77톤이나 되는 큰 화강암돌덩어리 30여 개로 석실을 구성한 무덤이 봉분은 다 벗겨지고 석실 또한 노출되어 일천 수백 년을 을 비바람에 견뎌온 고분이다.

    -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은 그것이 무덤인 줄도 모르고 널찍한 바위위에 올라가 춤추며 놀았기 때문에 이시부타이(石舞臺)라 불렀는데 60여년 전나라현(奈良縣)과 교토대학이 학술조사를 실시한 결과 비로소 주구(周溝)를 큰 돌로 둘러싼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 위 봉분은 둥글고, 아래 석실은 네모난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실(玄室)은 횡혈식(橫穴式)으로 길이 7.7m, 폭 3.6m, 높이 4.7m나 된다.

    - 이 고분도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이 전혀 나오지 않았고, 벽화도 없기 때문에 피장자의 신분은 물론 축조 연대조차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형식과 지하수 지하배수구가 있는 점 등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 서기501년-522년 재위)과 유사하여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 왕릉은 아니지만 그 규모로 보아 생존시 황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실력가의 무덤일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무령왕의 아버지가 도일하여 오사카 ○○○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고, 점차 그 무리들은 아스카(飛鳥)로 퍼져나가 비조사(飛鳥寺)를 짓고, 씨족 이름 목씨(木氏)에서 소하씨(小河氏)로 바꾸고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무덤은 소하씨의 실력자 소하마자(小河馬子)의 무덤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서경석교수의 설명
<석무대의 동서남북 사방의 모습>
입구쪽(동쪽)
왼쪽(남쪽)
오른쪽(북쪽)
뒤쪽(서쪽)
입구 들어가기
입구 통로는 발굴 조사 후 만든 것이란다.
내부 뒤쪽 벽면
내부 입구쪽 벽면
천정
큰 돌을 다루는 방법 설명 그림
석무대를 떠나며 증명사진 한 장

제5부 나라에서 아스카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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